...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3:18)
이 세상에 살면서 성도들이든지 아니든지 행복하고 기쁘게 누구나 살고 싶어합니다.
간혹 천성적으로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나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행복한 사람들을 관찰하여 그들에게서 행복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기쁨에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면 기쁨이 넘치는 사람의 기쁨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기쁨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자신에게서 배우고 그 배운 것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빌4:9) 바울은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특히 바울은 옥중서신을 쓸 때 로마의 옥중에 있었지만, 그의 서신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의 감옥은 환경이 아주 열악한 차가운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뻐할 수 있는 요인을 찾아서 기뻐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의 기쁨을 복음 전파에서 찾았습니다. 자기의 몸은 구속되어 있으나 다른 사람의 영혼이 마귀에게서 자유함을 얻는 사람들로 기뻐했습니다.
또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으로 기뻐한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어느 정도의 환경에서까지 기뻐하느냐,
또 무엇 때문에 기뻐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세상의 쾌락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기쁨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재미라고 합니다. 재미와 기쁨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하박국은 정망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쁨의 요소를 없는 환경가운데서 기뻐할 제목을 찾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다고 합니다. 하박국이 기뻐하는 것이 분명한 것은 그가 기쁨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사람을 벅차게 만듭니다. 벅찬 느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느낌을 표현하게 됩니다.
바울도 하박국도 자신의 벅찬 느낌을 형식적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쁨을 표한하고 있습니다. 기쁨은 표현할 때 더욱 강렬해지고 충만해집니다. 우리도 기쁨을 느끼고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바울과 하박국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위해 기쁨으로 장애물을 정복했습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감각을 개발하고 비결을 찾았습니다, 기쁨의 장소를 주 안으로 정했으며, 기쁨의 적인 염려를 정복했습니다.
그들은 기쁨을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찾았고 그 기쁨을 점차 배가시켰습니다. 표현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하박국이 힘든 환경에서 기뻐했다면 우리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염려되는 환경의 요소를 기쁨으로 정복했다면 우리도 주님 안에서 염려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재미를 느끼는 시즌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을 기뻐하는 달입니다.
2016년 마지막 달을 예수를 아는 기쁨에 거하시고 삶에서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God be glorious to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