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선생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절 후)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물을 생각이 없이 바삐 지냅니다. 그러나 좀 알거나 여유가 있고 물질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는 사람은 묻기를 좋아하고 답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답이 있는데 원하는 답이 아니라서 다른 답을 원해서 또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음이 아닌 물음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어떠하면 생명이 연장될까? 행복은 어디에 있나?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무엇 하면 영생을 얻어 행복을 맘껏 누릴까? 하는 종류의 질문입니다.
행복이나 영생은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지금 행복한 상태 안에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제일 중요하고 지금에 충실하라고 선생님들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을 때(창2:7) 이미 있었으며 행복한 존재로 행복 하여야만 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인간을 행복한 존재로 창조하였는데도 인간들은 지금 불안하고 삶의 한계를 느끼는가 하면 “사람이 내가 행복한 존재이구나! 영생하는 존재이구나!”를 못 알아차려서입니다.
그것을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인해 하늘을 볼 수 없고 땅만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듯이 죄가 영생과 행복의 실체를 가려서입니다. 행복이 가려있으니 안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린 것을 없애고 보게 하여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볼 수 있게 하려고 죄를 씻는 방법, 즉 다시 깨어날 수 있는 기회,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내가 거듭났다는 것은 내가“행복이구나, 영생이구나.”,“필요한 것이 다 되어 있고, 다 완성되어 있구나” 이것을 아는 것이 구원이며 행복이며 영생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무엇을 해야,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고 행복하게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물음들은 잘못된 물음이며 거짓 물음입니다.
사람은 건강해야,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등의 전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가난하여도 즐겁고 행복한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병든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많습니다.
에이즈에 걸린 환자 60%가 참 삶의 기쁨을 얻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왜 행복하지 않느냐 하면 이런 것들이 행복과 영생에 진정 필요한 것으로 오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거짓된 믿음과 틀을 깨러 오신 분입니다.
나를 선하다고 보는 것부터가 나를 잘못 보고 있다.
누구보다 선하고 누구보다 악하다 이지 선함 자체는 하나님 밖에는 없다고 하십니다.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꽃 다 차별이 없습니다. 구별이 없습니다. 각각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도 차별이 없습니다. 각각의 사람은 다 좋은 사람입니다.
구별이 없는데 차별이 있는 상태를 묻는 물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계명을 지켰냐고 묻습니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대견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사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어려운 계명을 다 지켰다니 대단한 결심과 정제된 행동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착한 행위에 만족하지 아니하시고 “너에게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말하십니다.
너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족한 것을 깨닫게 말씀하십니다. 깨닫게 해줍니다.
행복과 영생은 너희들의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행복과 내가 주는 행복의 차이가 있다”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있는 행복을 느끼고 깨닫고 하여서 너희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즐기어라!
너희들은 행복을 만들 수 없으니 부족하고 약한 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으면 하나님이 하신다.’를 아는 것이 영생이고 행복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