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이사야38:17)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원하지 않고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늘 행복만 있지 않고 항상 고통이 뒤 따릅니다.
밝음이 있은 후에 어둠이 있듯이, 낯이 있으면 어둠이 뒤따라오듯이 항상 같이 합니다.
낮음이 있으면 오름이 있듯이 항상 같은 모습과 같은 강도로 오지 않고 다르게 옵니다.
행복은 항상 따사로운 감정을 느끼게 하지만 고통은 어두운 느낌으로 다가오며, 사람을 아프게 하며, 힘들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보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기만 하지 인생에는 항상 고통은 있습니다.
그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미워하셔서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강제로 주는 것입니까? 고통을 당한다고 표현합니다. 왜냐면 자기가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피동적으로 표현합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수동적인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 이면에는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동정을 이끌어냅니다.
하물며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고통은 자신의 생각과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이 다가올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 느낌이 육체를 통하여 대뇌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이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통이 있다고 인생이 잘 못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고통을 더하시는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해석을 합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임무로 당연히 해야 할 일로 해석을 합니다.
인생이 고통을 당하면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고통이란 아픔이나 문제라기보다 내 생각과 바라는 것과 다른 형태로 온 그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여 나갈 수 있수 있느냐가 인생의 관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있는 것이 고통이구나 하며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드리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버릴 것이 없다는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고통을 받아드리십니다.
그 고통을 받으신 예수를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석을 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빌 2:9-11) 해석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신 것을 참은 것같이 빌4:10에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15절에 고통이라는 해석을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라고 바울은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배척하지 않고 스스로 받아드립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받아드리시는 것은 본 받아서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포용할 때 고통도 사랑받아 다른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옵니다.
사도바울은 빌4:1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라고 권면을 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고통을 표현합니다. 인생에서 큰 상실을 겪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감정을 제일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 아이가 화를 낼 때 어른들은 화내는 어린이를 다를 줄 압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너무나 잘 다루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