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22:14)
언제나 산은 우리에게 양식과 고기를 주는 곳이며 또한 지친 사람들을 위한 휴양처이며 세상의 번거로움에서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을 준비시키는 곳으로 만드시고, 예수님은 그곳을 가르치는 장소로 종종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가르치십니다. 내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입니다.
나도 예수께서 오르신 그 산을 올라야 하고, 예수님이 입을 여는 것을 잘 보아야 하고, 가르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산에서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중 결국에는 하나님의 이레라는 곳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산에 올라가 보아야 합니다.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면 인생의 방향을 잡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모르고 간다면 내가 가고는 있지만 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산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신비해서 모두가 한번은 올라보고 싶어 많은 이들이 입산을 합니다.
그러나 일단 산 속에 들어가 보면 바깥에서 보던 그 아름답고 신비한 맛과 멋은 없어지고 보이는 것은 바위와 나무요,
오르막 길 뿐입니다. 다리는 무겁고 허리는 쑤시고 배낭을 진 어깨는 빠지는 것같이 아픕니다.
온 몸에서 땀은 줄줄 흐르고 숨은 턱턱 막힙니다. 산이 산이 아닙니다.
이럴 경우 대개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 자리를 펴고 놀거나 잠을 자야 맛입니다. 샘터나 휴식처를 찾습니다.
도시락을 먹습니다. 올라야 할 산을 구경만 합니다.
올라갔다 내려오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서 자기도 정상을 본 것 마냥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무거운 다리를 끌고 아픈 허리를 받쳐가며, 흐르는 땀을 보람 삼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한걸음 올라갑니다. 숨이 차고 죽을 지경입니다. 결국은 정상에 오르고 맙니다. 산에 오른 사람들은 말합니다. 산은 역시 산이구나!. 전체가 보입니다. 방향을 알 수가 있고 어느 길로 왔는지 반추해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또한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알게 됩니다. 지나온 길이 확실히 보입니다.
선자리를 알고 방향을 아니 갈 길을 알게 됩니다. 살 가치를 느끼고 의미를 발견합니다.
일상과 영원이 떨어져 있지 않아 불안하지 않고 하늘과 땅의 통합이 된 나라는 존재를 발견합니다.
바로 영생을 살 수 있는 산에 오른 자입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어디서나 감사하고 누구나 통합니다.
누구나 통하고 언제나 기뻐하며, 어디서나 감사하는 삶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산에 오르는 고독과 고통을 견딘 사람만이 알고 누릴 수 있는 고견입니다.
삶의 부분 부분에 막히고, 여기 부딪히고 저기 걸리던 인생이 전체를 보므로 부분을 넘어 전체를 볼 수 있는 통합이 무엇인지 합하여 선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막혔던 부분을 넘을 수 있으니 능수요, 가로지른 계곡을 건널 수 있으니 능란이지 않겠습니까? 능수능란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산에 오르지 않고 산에 오르신 예수를 어떻게 만날 수는 없습니다.
눈을 뜨지 않고 입을 여신 예수를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귀가 열리지 않았는데 예수의 가르침을 어떻게 듣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산에 오를 수 있는 다리의 힘인 믿음을 기르는 것이 독립입니다.
예수의 여신 입을 볼 수 있는 열린 눈을 갖는 것이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을 들을 수 있는 것이 평안입니다.
산은 독립이요 통일이요 자유입니다. 산에 오른 나도 독립이요 통일이요 자유입니다. 산은 산 입니다. 나는 나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산에 오르신다. 나도 내 산에 올라가고 싶어 내산에 오릅니다.
내가 내 산에 헉헉대며 오르니 예수님께서 환한 모습으로 내 말에 귀를 모으시고 자연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합니다.
예수님이 들려 주시니 나는 듣습니다. 그분이 입을 열으십니다. 나도 내 입을, 닫혔던 입을 열어 하나님을 불러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에서 준비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