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1-27중 27절)
기독교는 구원을 받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유일무이한 종교입니다. 종교 분류상 다른 종교와 같이 기독교도 종교라고 분류하여 종교라 부르기에 같은 것이나 개념이 유사한 것으로 알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이 99도에 이른 것이나 100도에서 끓는 것이나 다르듯이 다릅니다. 또한 같은 배우라 불러도 배우마다 급이 다르고 작품에 임하는 배우들의 마음이 다르듯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개념과 격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단어와 개념이 다르며 뜻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죄란 단어도 세상에서 쓰는 단어와 기독교에서 쓰는 단어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죄는 범법한 상태를 죄 지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를 포함한 종교적 윤리적 법적 잘못을 모두 포함한 상태를 죄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일도 세상과 다른 종교와 같이 단어는 같이 쓰나 선하다는 말도 개념도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종교가들에 의하여 성도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단어가 구원과 선한 일입니다.
타 종교는 구원에 자기들이 이르는 길을 원하는 길을 가지만 기독교는 구원을 얻는 길을 가야하므로 출발점이 다릅니다.
선한 일도 착한 일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이 기독교에는 함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선한 일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유대교의 한 젊은 선한 자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선한 선생님인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세상에서 죄라고 하는 말과 유대교의 종교적인 죄를 포함한 십계명을 지켰는지 물어봅니다. 세상에서의 기준인 죄를 지었느냐 아니냐를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적인 말씀인‘네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선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1절에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는데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사랑하심을 모르는 체 결국 근심하여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재물에서부터 믿음을 출발하지 말고, 재물로 이루는 길로 가지 말고, 재물을 통해 얻는 길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 젊은이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포기하고 갑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그것을 얻어야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것, 즉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실로 신봉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들은 옛날부터 있어왔지 새것이 아니며 또한 이것이 내 거다 해서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죽으면 끝인데,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데,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인데 소유하려는 생각으로 인해 굉장히들 힘들어 합니다.
성화는 세상에 물질에 연연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고 선한 자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화는 선한 일을 하는 계속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성화는 재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얻은 그것으로 당연히 나누어 주게 되는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물은 99도도 뜨거운 물입니다. 그러나 100도가 되어 버리면 눈에 안 보이는 기체로 수직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나 세상에서 말하는 선한 일은 물이 99도 까지 있는 상태며 기독교의 성화는 선한 일이 계속된 차원이 다른 상태입니다.
마치 물이 99도까지 즉 어떤 환경까지는 같아 보이는데 100도 즉 99도 보다 약간 높은 상태에 이르면 차원이동을 합니다.
성화는 변화를 일으킨 사람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행동으로 종교가들이 말하는 선한 일과 다릅니다.
선한 일은 단지 착한 일에 국한 되지만 성화에 의한 선한 일은 영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에 의한 선한 일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게 만드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성화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얻는 선한 행위의 집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