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아모스3:3)
요즘 자녀들은 자기들의 앞길을 준비하러 점점 부모를 떠나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들은 적적함을 느낍니다. 외로움을 메우려고 여러 가지 일들과 사건들이 벌어지며 사회를 혼탁하게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동물들이 자식들의 자리를 차지하여 이젠 애완동물을 넘어 반려동물이라 부른다. 인권보다 동권이 앞서서 반려동물들에게 가족이라며 유산을 남겨줍니다. 귀여움과 재롱으로 즐겁게 하는 애완동물을 넘어, 사람이 의지하며 같이 살고 어디든지 동행 하는 동물을 반려동물이 됐습니다. 자식들은 유산을 차지하려고 싸우므로 짐승이 되지만 동물은 욕심이 없어 자식보다 우선순위가 됩니다. 자식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대표적인 가축 중에 개와 고양이가 단연코 많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반려동물들은 다른 동물들 보다 IQ가 높다고 조사됩니다. IQ란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IQ가 높은 자는 빨리 많은 것을 받아들이는 지능을, 낮은 IQ는 적게 오랫동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 낮은 능력을 수치로 메긴 것입니다. 조금 공부했는데 좋은 점수를 얻고, 많이 공부했는데 생각보다 낮은 점수를 얻게 됩니다. 예외로 낮은 IQ로 많은 시간을 들여 좋은 점수를 내는 노력의 사람도 있습니다.
야생동물은 사람의 뜻과 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본성에 충실한 동물이며, 반려동물은 주인의 의지와 뜻에 본성을 이기며 순응하기 때문에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이 IQ가 높다합니다. 개와 고양이는 사람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므로 반려동물로 각광을 받습니다. 그들도 본성이 있지만 본성을 억누르고 본성 위에 주인의 명령과 바람과 뜻을 잘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바람을 마음에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에녹은 창5:22‘하나님과 동행하며’라 기록되었으며, 히스기야 왕은 왕하18:5‘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를 6절에서 그 의지를‘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유추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며, 그 의지는 연합, 즉 떠나지 않은 동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려동물이 주인을 떠나지 않고 의지하여서, 사람이 동물을 의지하여서 같이 연합하여 서로 갈라지지 않는 것이 동행인 것입니다. 그래서‘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같이 동행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역으로 같이 동행하려면 뜻이 같아야 합니다. 동행하는 두 사람 능력이 비슷하면 서로 맞추어야 합니다.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주장할 것은 반영하여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보다 강하든지, 능력이 많다면 당연히 한사람이 많은 부분을 쫓아가야 합니다. 능동적으로는 강한 자의 뜻에 자기 자신을 부합해야 합니다.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행하려면 당연히 전지전능한 하나님에게 사람이 많은 부분을 맞추어야 함이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이 사람이 목이 뻣뻣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이 가는 외향은 동행이지만 속 내용은 순종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히스기야처럼 사람에게 동물처럼 의지하여야 합니다.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잘 해하려 맞추어나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없으므로 우리는 그분이 돌쳐서 믹돌과 바다 사이 바알스본 맞은편으로 가라하면 가야하며 바울에게 하나님이 빌립보로 가라하면 바울이 가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디로 가라는 소리가 안 들릴 때에는 못들었으니 내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곳이 하나님이 원하는 곳이 되게 하여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를 하나님을 의지하는 행동이라고 합니다.‘하나님과 연합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것으로 우리는 자격이 없지만 그분이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시어 우리로 동행케 해주십니다.
현대에 많은 외로움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시면 행복이 언제나, 어디서나 넘칩니다.